일본에서 30년째 거주 중인 오랜 친구가
한국을 찾았습니다.
강산이 세 번 변할 시간 동안 그녀는
일본인 남편과 가정을 꾸리고,
주변에 한국인이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환경에서 오로지 일본어에 의지해
삶을 일궈왔습니다.
오랜만의 재회에 들뜬 마음으로
마주 앉았지만, 우리는 대화 내내 기묘한 정적과
마주해야 했습니다.

30년의 세월이 만든 단어 맞히기 퀴즈시간
입니다.
친구와 수다를 떨다 보면 대화가 자꾸만
툭툭 끊겼습니다.
분명 머릿속에는 할 말이 가득한 눈치인데,
입 밖으로 나오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것이었죠.
친구는 대화 도중 일본어 단어를 불쑥
뱉었다가, 곧바로 멍한 표정을 지으며
하늘을 보곤 했습니다.
"야 란쵸맛토 이쁘네"
"뭐?"
"아... 한국말로 뭐더라? 아, 미치겠네!"
하루 종일 옆에서 단어 맞히기 퀴즈를 하는
기분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얼마나
답답할까 싶어 웃음과 안쓰러움이 동시에
밀려왔습니다.
30년 전 부산 사투리를 쓰던 명랑한 소녀는
간데없고, 한국어 단어 하나를 찾기 위해
뇌 속의 거대한 도서관을 헤매는 이방인이
제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뇌는 왜 모국어를 비활성 상태로 만들까?
심리학과 뇌과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언어 마모(Language Attrition)라고
부릅니다.
흔히 모국어는 절대 잊히지 않는 각인과 같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 뇌는 철저하게
생존과 효율에 따라 움직이는 기관입니다.
우리 뇌의 신경 가소성은 한정된 에너지를
가장 자주 쓰이는 곳에 우선 배정합니다.
30년 동안 일본어로 사고하고 소통하며 살아온
친구의 뇌 입장에서 한국어는 더 이상 쓰이지 않는
오래된 데이터로 분류됩니다.
뇌는 효율을 높이기 위해 자주 쓰는
일본어 회로는 고속도로처럼 넓게 확장하고,
쓰지 않는 한국어 회로는 좁은 골목길처럼
방치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단어라는 물건 자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을 꺼내러 가는 길에
잡초가 무성해져서 찾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인출 오류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언어는 잊어도 정서는 마모되지 않는다
재미있는 점은, 단어를 잊어버려 멍하니
서 있는 그 찰나의 순간에도 친구의
한국인 소울은 여전했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어로 단어를 찾으며 쩔쩔매다가도,
매콤한 음식을 먹으며 터져 나오는
리액션이나 친구 사이의 끈끈한 유대감은
30년 전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언어는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가 어디에 발을 딛고
살아왔는지를 보여주는 훈장과도 같습니다.
친구가 겪는 이 웃픈 버퍼링은 그녀가 낯선
타국 땅에서 얼마나 치열하게 현지 언어에
적응하며 살아냈는지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지표일지도 모릅니다.
글을 마치며..
언어의 소중함을 되새기다
오늘 친구와의 만남은 저에게도 깊은 울림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내뱉는 모국어 한 마디가
사실은 매일같이 닦고 조여야 유지되는
정교한 장치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해외에 계신 수많은 한인 여러분도 가끔
이 답답한 버퍼링 앞에 서 계신가요?
너무 자책하지 마세요.
그 버퍼링은 당신이 그곳에서 성실하게
살아왔다는 가장 인간적인 증거일 테니까요.
조만간 일본으로 돌아가는 친구에게,
다음엔 내가 한국어 단어장을 선물하겠노라
농담을 건네며 환하게 웃어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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